비상식량이란 사실 대단히 특별한 음식을 일컫는 용어는 아닙니다. 단순히 긴급한 재난 상황을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둔다면, 어떤 것이라도 비상식량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재난 상황에 적합한 식량은 어느 정도 요건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어떤 식량이 '좋은' 비상식량인지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좋은 비상식량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 번째는 보존성입니다. 재난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언제 발생하더라도 즉각 섭취할 수 있도록 보존성이 뛰어나야 합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비상식량들은 대부분 보존성을 위해 동결건조 되어 있거나, 통조림 형태로 장기적 보존을 꾀하고 있습니다. 보존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 끼~두 끼 분량으로 포장되어 있는 소량포장이 더 유리하겠지요. 식품은 개봉 후 급속도로 부패하기 때문에, 대량 포장의 경우 빨리 섭취하지 않으면 애써 준비한 식량을 버리는 상황이 올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섭취의 용이성입니다. 약간의 불이나 물을 이용해 조리가 가능하거나, 혹은 물과 불 없이도 섭취할 수 있는 편이 좋습니다. 재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섭취가 용이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충분한 열량과 영양소를 갖춰야 합니다. 보통 비상식량은 고칼로리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으며, 필수 영양소 결핍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여 다양한 종류의 식품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휴대성이 좋아야 합니다. 휴대성이 좋다는 말은 작은 패키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장기적인 비축을 고려한다면 전반적으로 부피가 적은 것이 유리합니다. (1년치의 식량이 어느 정도 부피를 차지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다섯 번째는 맛입니다. 아무래도 기능성 식품이라는 인식 때문에 맛에 대한 중요성은 다른 요건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입니다. 하지만 재난 상황이 닥쳤다고 하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더군다나 장기적으로 먹어야한다면 생존에 가장 중요한 '사기'가 떨어지게 됩니다. 인간에게 식품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연료가 아닌, 문화이기도 하니까요.
외국에는 모든 요건을 갖춘, 심지어 보관기한이 25년에 달하는 전문적인 비상식량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이상스럽게도 비상식량에 대한 인식이 낮은 편입니다. 간편하게 물을 부어 먹는 전투식량이나 라면 정도가 비상식량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식품이라 수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니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집에 비상식량을 비축해볼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실 막막함이 밀려오는게 당연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식품들이 용이하고, 어떤 식으로 비축해야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라면>
먼저 라면은 좋은 비상식량이 아닙니다. 라면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않고, 조리에 많은 물과 연료가 필요합니다. 물론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영양소도 불균형하며, 나트륨이 높아 갈증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장기보존용 식량으로는 불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짧은 재난상황을 고려한다면, 익숙한 맛과 간편함은 큰 무기가 될 수 있으니 소량을 비축해두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통조림류>
통조림은 애초에 음식물을 장기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발명품입니다. 마트 통조림 코너에 가보시면 정말 많은 종류의 통조림 식품이 존재하니, 각자 취향에 맞는 식품을 사서 보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참치도 통조림의 일종이죠. 통조림의 경우 유통기한이 2~8년 정도이지만, 간혹 과일 통조림처럼 산도가 높은 식품의 경우 보관중 가스가 발생해서 캔에 녹이 발생하거나 부패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통조림의 금속이 사람에게 좋지않다는 뉴스들이 보이지만... 선택은 본인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기성 비상식량-동결건조식품>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한끼 정도 분량을 팩에 진공포장해둔 동결건조식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탄생목적 자체가 비상식량인만큼 대단히 좋은 비상식량이고, 맛 또한 기호에 맞게 다양하며, 영양소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는 최고의 식품입니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않으므로 본인의 여력에 따라 비축해두면 좋겠습니다. (비빔밥형 전투식량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프랑스식 식량이 많이 보이더군요.)
<크래커형 비상식량>
다트렉스 류의 열량을 위한 크래커류는 부피대비 칼로리가 높은 편입니다만... 이런 제품들은 이동시 발생하는 조난 상황에서 특화된 식품들입니다. 영양소의 불균형과 갈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본격적 장기보관 식품으로는 의외로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곡식류/면류>
인스턴트에 가까운 식품들만으로 장기적 재난을 대비하는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합니다. 주식인 밥이나 익숙한 음식에 대한 니즈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쌀이나 밀가루, 국수, 파스타 면 등을 빈 페트병에 넣어두고, 제산제와 함께 밀봉하면 10년 이상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는 점, 참고해 두면 좋겠습니다.
<간식류>
전통적인 비상식량인 육포(양념이 된 촉촉한 것 제외), 양갱, 초콜릿, 사탕, 설탕, 시리얼바 등등은 칼로리도 높고, 부피도 작고 장기보관도 가능한 식품들입니다. 특히 '당류'는 활동에 필요한 직접적인 에너지를 대량으로 제공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양념류>
재난 상황에서는 자력, 물물교환, 보급을 통해 육류나 어류 등의 식재료를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기본적인 양념류가 없다면 의외로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소금, 후추, 라면스프 등은 부피도 크지 않고 보관도 어렵지 않으니 소량이라도 비축해두어야 합니다.
<김치/젓갈/장류>
김치는 엄연히 '묵은지'라는 요리가 존재하는 장기보관식품입니다. 김장을 할 때 별도의 밀폐용기에 담아 장기보관용으로 비축해두면 다양한 요리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기보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젓갈류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장류는 장기적으로 풍족한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용한 비상식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수>
생존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엄연히 '식량'에 속하는 식수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수는 부피 문제로 인해 미리 비축해두기가 매우 힘든 항목이므로, 정수나 식수 확보에 대한 대비책을 반드시 강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대략적으로 살펴보며 어떤 물품을 비축할지 생각해봤습니다만... 또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장기보관식량이라도 필연적으로 섭취 가능한 유통기한이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재난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이러면 준비해뒀던 모든 식품을 버려야하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됩니다. 따라서 무작정 음식을 비축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비축식량들을 살펴보며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들은 평상시에 식사나 간식으로 소비하고, 자신이 소비한 물품들을 새롭게 채워두는 식으로 관리한다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상식량의 맛에 입맛을 적응시켜둘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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